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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소리 텅 빈 소리 서인석 설거지를 하다 컵 두 개가 부딪쳤다 아무도 건배하지 않았는데 맑은 소리 하나 부엌을 오래 돌았다 한때는 그 소리 사이에 웃음도 있었고 서로의 이름도 있었을 것이다 희미한데 빈 컵은 누구를 기억하는지 가만히 놓아두어도 제 몸 안의 적막을 자꾸만 울린다 나는 물기를 닦다가 컵 하나를 먼저 넣고 남은 하나가 내는 소리를 찬장 문으로 천천히 덮었다 — 서인석
- 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비워도 채워지지 않는 서인석 한 잔을 다 비우고 빈 잔을 싱크대에 놓는다 수도꼭지를 틀면 잔 속은 금세 맑아지는데 내 안에 남은 저녁은 아무리 흘려보내도 그대로다 너를 지웠다고 말한 주머니 속 열쇠만 만지작거렸다 혼자라는 건 사람이 없는 일이 아니라 문을 열었을 때 내가 왔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도 채워지지 않은 쪽은 늘 나였다 — 서인석
- 그늘진 쪽부터 그늘진 쪽부터 서인석 밤새 눈이 내린 아침 한 노인이 아파트 계단을 쓸고 있었다 햇볕이 먼저 닿는 곳은 가만히 두고 건물 뒤편 그늘진 계단부터 삽으로 긁어냈다 거긴 오후에도 잘 녹지 뒤돌아보지 않고 다음 계단으로 옮겨갔다 나는 한동안 그가 남긴 좁은 길을 보았다 밝은 곳을 더 밝히는 일보다 늦게 녹는 곳을 먼저 아는 사람 나도 그런 쪽으로 하루를 살아보고 싶었다 — 서인석
- 그날 아침의 직사각형 그날 아침의 직사각형 서인석 네가 떠난 다음 날에도 알람은 같은 시각에 울렸다 나는 끄지 못한 채 천장만 보고 있었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방바닥에 반듯한 네모 하나를 놓았다 문 쪽으로 조금씩 옮겨갔다 한낮을 다 쓰고 저녁이 되자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같은 자리에 또 밝은 네모가 놓였다 나는 한참 뒤에 일어나 그 빛의 끝에 한쪽 발을 올려놓았다 — 서인석
- 해가 들지 않는 날에도 해가 들지 않는 날에도 서인석 비가 사흘째 내리던 날 방 안은 종일 어두웠다 나는 불도 켜지 않고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젖은 우산부터 세워두었다 따뜻한 해가 들지 않는 날에도 사람 하나가 곁에 있으면 어두운 방 안에서 하루는 다시 시작되었다 당신은 나의 해가 아니라 해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내 쪽을 향해 앉아주는 사람이었다 — 서인석
- 돌아서면 눈물이 납니다 돌아서면 눈물이 납니다 서인석 전화를 걸면 늘 먼저 묻습니다 밥은 먹었느냐 아픈 데는 없느냐 나는 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도 괜찮으냐 물으면 먹었다고, 괜찮다고 언제나 같은 당신이 늙어가는 것이 내가 늦게 알아가는 것 같아서 내 안에 가장 먼저 들어와 가장 오래 머문 그리움 세상 모든 이름을 잊어도 끝내 잊을 수 없는 이름 그게 바로 엄마입니다 — 서인석
- 고백하지 못한 마음 고백하지 못한 마음 서인석 밤새 편지를 쓰고 아침이면 다시 찢었지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연습하고 너를 만나면 건네려고 주머니 속에 꼭 쥐고 있었지만 막상 네가 우리의 시간이 달라졌을까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아보며 후회하지만 말하지 못해 아팠던 마음도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 오래된 망설임마저 나의 청춘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아 — 서인석
- 아무 계획도 없던 그날들 아무 계획도 없던 그날들 서인석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며 오늘만 생각하던 우리 갈 곳을 정하지 않고 버스 종점까지 가보기도 하고 주머니가 가벼워도 마음까지 가난하지는 않았지 그게 믿는 마음이었어 지금은 하루를 시작하기 전부터 시간과 돈을 먼저 계산하지만 그때는 아무 가진 것 없어도 숨만 쉬어도 좋았어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라서 오늘은 더 눈부시게 생각나 — 서인석
- 청춘은 계절이었다 청춘은 계절이었다 서인석 봄처럼 설레며 찾아와 작은 바람에도 가슴이 뛰었지 여름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두려움 없이 꿈을 향해 달렸지 가을처럼 하나둘 내려놓으며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해마다 다시 오고 여름도 다시 뜨거워지는데 나의 청춘만은 한 번 간 뒤 돌아오지 않더라 그래서 더 눈부셨고 그래서 더 아쉬웠으며 가슴속에 오래 남아 오늘도 문득 그리워지는 계절 — 서인석
- 아무도 몰랐던 노래 아무도 몰랐던 노래 서인석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흥얼거리던 멜로디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만 가만히 듣고 있었지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박수 한 번 없었지만 그때의 나는 참 줄 알았는데 문득 혼자 있는 밤이면 그때의 멜로디가 다시 나를 부르네 비록 무대는 없었어도 노래를 멈추지는 않았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그 노래가 오늘의 나를 데려왔으니까 — 서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