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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살의 바다 스무 살의 바다 서인석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던 스무 살의 그 여름 주머니에는 가진 것 없어도 마음에는 먼 길이 열려 있었지 바람 한 줄기에도 설레고 사랑 한마디에도 흔들리던 때 우리는 두려움도 사라지는 듯했지 돌아갈 길을 몰라도 앞으로만 걸을 수 있었던 우리 그날의 바다는 멀어졌지만 파도처럼 밀려오던 그 마음은 지금도 내 가슴 어딘가에서 푸른빛으로 출렁이고 있어 — 서인석
- 그때 나에게 쓰는 편지 그때 나에게 쓰는 편지 서인석 거울 속 나를 보며 가끔은 묻곤 해 그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이 급했을까 남들보다 늦을까 봐 잠시도 쉬지 못하고 넘어져도 아픈 줄 모르고 또다시 달려갔지 그때 나에게 편지를 쓴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았다고 넘어졌던 그날들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너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 서인석 시를 쓰고 나서 젊은
- 골목 끝 노을빛 골목 끝 노을빛 서인석 학교가 끝나면 너와 함께 걷던 길 그 골목 끝에 가만히 서 있던 노을 지금도 가끔 노을빛을 바라보면 나는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골목 끝 노을빛에 우리의 청춘이 묻어 있어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녁 하늘에 번지는 빛은 다시 우리를 데려오네 — 서인석 시를 쓰고 나서 학교가 끝나면 친구와 함께 걷던 골목이 있었습니다.
- 다시는 그렇게 못 살겠지 다시는 그렇게 못 살겠지 서인석 밤새도록 웃고 울고 다음 날도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사는 게 당연했던 시절 그게 청춘이었어 다시는 그렇게 못 살겠지 그 무모함도 용기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지금은 무슨 일이든 겁부터 나는 나지만 그때 우리는 세상을 날아다녔지 — 서인석 시를 쓰고 나서 젊을 때는 밤새 웃고 울어도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 기다림도 사랑이라면 기다림도 사랑이라면 서인석 한 계절이 또 가고 시간은 무심히 흐르는데 나는 같은 자리에 서서 네 이름만 붙잡고 있지 기다림도 사랑이라면 나는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루도 언젠가는 네게 닿을까 잊으려 할수록 왜 너는 더 선명해지는 걸까 이 마음이 멈추지 못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기다림이라서 기다림도 사랑이라면 나는 아직 너를 놓지 못한 거야 — 서인석
- 달빛 편지 달빛 편지 서인석 말하지 못한 그 밤의 말들 달에게 대신 전해달라 했지 조금은 부끄러운 내 마음을 은빛 속에 감춰 보내보았어 달빛에 적은 편지 지금쯤 네 창문에 닿았을까 밤이 깊을수록 나는 너를 더 또렷이 쓴다 너도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좋겠다 달 하나만 바라보아도 우리 마음이 같으면 좋겠다 달빛 편지에 담은 사랑 언젠가는 너도 읽어주었으면 — 서인석 시를
- 깨진 유리 앞에서 깨진 유리 앞에서 서인석 오래전 깨진 유리를 치우다가 손목을 베었다 피는 생각보다 오래 났고 흰 붕대 아래에서 상처는 혼자 아물었다 왜 하필 내 손이었는지 그때는 자꾸 억울했다 몇 굽히자 오래된 흰 자국이 잠깐 선명해졌다 상처마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한 번 베인 손으로 누군가의 발 앞에 놓인 날카로운 조각을 먼저 치울 줄 알게 되었다 — 서인석
- 잠시 머물다 가는 길 잠시 머물다 가는 길 서인석 오래 걸은 날에는 길보다 먼저 나무 벤치가 보였다 나는 앉아서 신발 속 모래를 털고 물병에 남은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누군가 먼저 앉았다 간 자리에는 등의 기울자 내 그림자가 먼저 일어섰다 나는 잠시 뒤 무릎을 짚고 따라 일어났다 머물렀던 자리에는 눌린 풀 몇 포기와 내 몸의 온기만 남았다 그것도 오래지 않아 제 모양으로 돌아갔다 — 서인석
- 저녁이 내 이름을 부르던 때 저녁이 내 이름을 부르던 때 서인석 해가 담장 아래로 내려가면 골목의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영수야 밥 먹어라 정희야 이제 들어와 열린 창문마다 저녁이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아쉽기만 했는데 이제는 안다 하루가 아무리 멀리 데려가도 나를 데리러 나오던 목소리가 집이었다는 것을 해 질 무렵이면 가끔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 하나가 먼저 대문 쪽을 돌아본다 — 서인석
- 서로의 뒷머리 서로의 뒷머리 서인석 당신은 비닐장갑을 끼고 내 뒤에 앉았다 가르마를 한 줄씩 나누며 여기도 많이 희어졌네 작게 말했다 나는 웃으며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염색약 냄새가 욕실 안에 겨울이 소복이 내려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보이지 않는 시간을 한 올씩 만졌다 머리를 다 감고 난 뒤 당신 귀 뒤에 남은 가느다란 흰머리 한 올을 나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 서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