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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눌러 쓴 말 눌러 쓴 말 서인석 그날 네가 던진 말은 연필심이 부러질 만큼 세게 눌러 쓴 문장 같았다 지우개로 몇 번을 밀어도 종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손끝으로 문지르면 패인 자리부터 읽혔다 나는 나를 누른 만큼 너도 어딘가에 눌려 있었을까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는 너를 미워하는 힘으로 내 하루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미워도 끝내 미워지지 않더라 — 서인석
- 살아서 좋았다 살아서 좋았다 서인석 병원 금식이 끝난 날 쟁반 위에 미음 한 그릇이 왔다 숟가락을 들자 손이 조금 떨렸다 한 숟갈이 목을 지나가는 동안 복도 끝에서는 카트 바퀴가 울었고 창밖의 차들은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오래 입안에 두었다 천천히 마지막 한 숟갈까지 먹고 그릇 바닥을 환하게 드러냈다 살아서 좋았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빈 그릇을 한참 바라보았다 — 서인석
- 다음 문장 다음 문장 서인석 젊을 때 나는 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대답부터 꺼냈다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사람의 마음은 두 칸이면 충분한 줄 알았다 머뭇거리는 입술도 길어진 숨도 말 못 하고 나이가 들면서 나는 조금 늦게 대답한다 한 사람이 말을 마친 뒤에도 잠시 입을 다문다 내가 다 안다고 여겼던 동안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 사람의 다음 문장이었다 — 서인석
- 세 사람의 손 세 사람의 손 서인석 마흔의 나는 무너질까 봐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했다 쉰의 나는 무너진 것들 곁에서 먼지를 털고 한 번쯤 웃었다 예순의 나는 두 사람을 불러 내 옆에 조용히 앉힌다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나던 사람 세 사람의 손을 한곳에 모아보니 주름의 깊이만 다를 뿐 모두 내 손이었다 누구도 환하게 빛난 적은 없었지만 끝내 누구도 나를 놓고 가지 않았다 — 서인석
- 하얀 밤 2 하얀 밤 2 서인석 밤이 깊은 건가 아침이 이른 건가 어둠이 빛을 깔고 누운 자리에 엄지발가락만 갸우뚱 씰룩이는 밤 싸리빗자루 등짝에 쫙 퍼지는 매서운 밤바람에 떠밀려 홀짝 비운 어설픈 하얀 밤, 눈꺼풀을 잡고 있네 내 살아온 날 중 오늘이 몇 번째 하얀 밤일까 아니, 오늘이 몇 번째 어제일까 내 삶의 몇 날 며칠, 하얀 밤 내 인생 몇 날 며칠, 하얀 밤 — 서인석
- 안주 없는 밤 안주 없는 밤 서인석 소주병 하나와 젓가락 한 벌을 놓았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김치통 구석에 어제 먹다 남긴 저녁이 있다 한 조각 집어 오래 씹는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입 안이 별것 아닌 말도 안주가 되었는데 혼자 마시는 밤에는 김치 한 조각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잔을 비운 뒤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는다 식탁에는 아직 한 사람 몫의 소리만 남아 있다 — 서인석
- 고요한 잔소리 고요한 잔소리 서인석 밥은 먹었냐 술 좀 줄여라 그 두 마디가 사라지고 나니 집이 너무 넓어졌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아도 무얼 찾느냐 묻는 사람 없고 늦은 밤 현관문을 열어도 불을 귀찮아서 대답도 건성으로 했던 말들이 하루 종일 한 번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가 너무 큰 밤이면 나는 컵을 조금 세게 내려놓는다 누군가 안방에서 조용히 좀 하라고 말해줄 만큼 — 서인석
- 취한 건 외로움이었다 취한 건 외로움이었다 서인석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네 얼굴이 떠오른 줄 알았다 새벽 두 시 빈 병을 세어보다가 잔 밑에 눌려 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떠난 사람보다 남겨진 나를 견디지 사랑하는 일도 서툴러 손을 내미는 대신 잔을 먼저 들었다 눈물은 너에게 가지 않고 내 쪽으로 오래 흘렀다 아침이 오자 취기는 먼저 가셨고 나는 처음으로 어젯밤의 나를 혼내지 않았다 — 서인석
- 술 한잔 놓고 가라 술 한잔 놓고 가라 서인석 이 집까지 왔으니 술 한잔 놓고 가라 마시지 않아도 좋다 맞은편 의자에 네 외투만 걸쳐두어라 말이 없으면 어떤가 잔 부딪치는 소리 하나면 이 방도 잠시 사람 사는 집이 될 테니 나는 술보다 네가 돌아간 뒤에도 남아 있을 의자의 자리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다 다정함이란 거창한 말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서둘러 일어나지 않는 것 — 서인석
- 빈 잔, 빈 방, 빈 마음 빈 잔, 빈 방, 빈 마음 서인석 술잔을 들었다 놓으면 식탁에 둥근 자국 하나 생긴다 저녁 뉴스가 끝난 뒤에도 텔레비전 속 사람들은 입을 움직이고 나는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소리를 돌아온다 찬 술은 목을 지나갔지만 방 안의 공기는 그대로다 잔을 다시 채우다 손등으로 식탁을 훔친다 닦인 것은 술자국뿐 누군가 앉았던 것 같은 그 둥근 자리는 밤새 마르지 않는다 — 서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