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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촌호수 옆에있는 "삼전도비" 잠실역 3번 출구로 빠져나와 삼전도비로 출발~ 삼전도비 :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인조 17년(1639)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1916년 파손된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 문서 고적조사위원회 복명서 다이쇼 5년 12월 1일 이지마 모모노스케 삼전도비는 원래 청나라에 항복을 했던 삼밭나루터(삼전도
- [한능검 핵심노트] 13편 양난의 극복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 곽재우 의령 / 조헌 금산 / 휴정·유정 승병 / 명량 13척 / 노량 / 비변사 / 5군영 훈련도감 / 공명첩 / 광해군 중립외교 / 동의보감 / 인조반정 / 정묘호란 / 병자호란 / 남한산성 / 삼전도 굴욕 / 척화파 김상헌 / 주화파 최명길 / 효종 북벌 / 어영청 / 나선정벌 ▣ 한 줄 정리 일본 임진왜란 7년과 청 병자호란 두 달 — 조선이 두 번의
- 병자호란 치욕도 ‘내란 누명’ 軍 숙청이 불렀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아직 만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구는 200만~3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반면 조선은 1000만명을 넘었다. 임진왜란 때와 달리 변변한 전투도 없이 ‘삼전도 굴욕’을 당했다. 당시 조선은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한 안보 전문가는 ‘이괄의 난’ 여파를 꼽았다.
- 와룡매(臥龍梅)! 그 기구하고 모진 운명에 대한 이야기 병자호란 때 인조의 삼전도 굴욕이 그랬다. 일제 강점기 때 덕혜옹주의 삶이 그러했다. 기구한 운명은 사람만의 몫이었을까? 아니다. 사람들의 일만은 아니었다.
- 심양 고궁 박물관 우리에게 병자호란,삼전도 굴욕을 안긴 홍타이지의 기록물도 전시/안내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다시 없는 치욕을 안겨 준 홍타이.......
-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 무릅을 꿇고 절을 하는 항복...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 12월 ~ 1637년 1월 청나라(홍타이지- 태종)의 침입으로 조선이 참패한 굴욕적인 전쟁. 인조와 소현세자는 삼전도(三田渡 :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례(降禮)를 올리는 조선 최대의 치욕적인 역사였다.
- 남한산성 병자호란 발발 47일 만이었다. 그는 서울 송파구 삼전동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를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 삼전도 굴욕 역시나 인조까기 역시 누구 까는 재미가 있죠 오늘은 역사를 돌아보며 인조 까기 그중 삼전도 굴욕 사건 입니다 삼전도 굴욕 얼마전에 이야기 했듯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후에 생긴일인데 인조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마빡에 피터지도록 굽신댄 사건입니다 1637년 병자호란 발발 45일만에 인조가 항복을 결정 그동안 항전해오던 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식을 행했는데 그때 곤룡포가 아닌 평민이
- 17대-18대 효종(봉림대군)(영릉,녕릉), 현종(숭릉) ■ 17대-孝宗(1649-1659) 봉림대군(鳳林大君) 이호(李淏) (청나라에 패한 후 삼전도 삼배구도구례를 행하는 아버지(인조) 옆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봉림대군(왼쪽), 형( 병자호란 때 형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 복수를 위해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했으나 여러 여건상 결국 실패하고 41살의 일기로 죽음.
- 파묻어버리고 싶었던 부끄러운 역사, 삼전도의 굴욕이 새겨진 비석 - 송파 삼전도비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중국에서 명(明) · 청(淸) 교체기에 접어든 시기에 인조반정(1623)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인조(仁祖, 1595~1649)와 서인 정권은